이 한 기 마산대학교 명예교수 ∙ 칼럼니스트 [칼럼] 기대수명 93세라는 것에 대한 상념
현재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얼마나 될까. 남자는 80.3세, 여자는 86.3세라고 한다. 과거에 비하면 엄청나게 늘어난 수치다. 조선시대 임금 27명의 평균수명은 46.1세이고 백성들의 평균수명은 약 44세라는 통계가 있다. 고려시대 왕들은 그보다 짧아서 42세라고 한다. 그 시절에 비하면 한국인의 수명이 두 배가량 늘어난 것이다.
요즘 인터넷상에 ‘기대수명계산법’이라는 애플리케이션이 있다. 여기에 각종 정보를 입력해 보면 현재 성인들의 기대수명은 얼마나 될까.
궁금증이 생겨 설문 항목에 각종 정보를 입력해봤더니 93세, 내가 93세까지 산다고 나왔다. 잔존수명은 25년 9125일 산다고 찍혀 나왔다.
요즘 우리 주변을 보면 100세 이상인 어르신도 적잖게 있다. 김형석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는 100세가 넘었는데도 강의, 집필, 운동은 물론 사회활동도 하신다고 전해진다.
김교수님께서 얼마 전 아침마당(KBS) 프로에 나와서 하시는 강의를 들었는데, 논리정연하고 유머까지 섞어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 100세까지 어느 정도 건강을 유지하며 살면 복을 받았다고 하는데, 김 교수님은 사회활동까지 활발하게 하니 아주 특별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평생 강의하고 글 쓰며 살아온 나로선 김 교수님이야말로 롤 모델이 아닐 수 없다.
내 기대수명이 93세로 나왔으니 처음에는 ‘아싸 !!!’라는 즐거운 감탄사가 나왔다. 잠시 후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우선 ‘이 놀라운 정보를 자식들에게 알려야 하나?’ 심사숙고한 끝에 일단 알리지 않기로 했다.
나는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뒀는데 부모 말 잘 듣고 나름 사회생활을 잘 하고 있다. 그러나 자식들에게 아빠가 93세까지 산다고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물론 말로는 축하한다고 하겠지만 역지사지를 해보니 진짜 좋아할 만한 일인지 잘 모르겠다. 그때까지 김형석 교수님처럼 건강할지도 모를 일이고, 거동도 불편해서 틀림없이 자식들에게 폐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일단 아이들에겐 함구하기로 마음먹었다.
나의 기대수명이 93세라고 말하고, 강의하고 있는 20여명의 성인 수강생들에게 말했더니, ‘헐 아쉽지 않을까 100시대에 고작‘ ’누구나 90세를 산다면 젊은 세대에 부담이 많지 않을까‘ ’교수님은 딱 보기에 딱 9988 일것 같아요‘ 라는 등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다. 그리곤 자기네들의 기대수명이 얼마나 될지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진다.
그래서 곧장 휴대폰을 깨내게 하여 ‘기대수명계산법’을 알아보도록 해 보았더니 다들 흥미있게 계산을 해보고들 있다. 결과는 80세에서 120세 정도까지 나왔다고 다양하게 말씀하시며 깔깔들 웃으신다. 기대수명이 적게 나오신 분들에게는 체크하는 항목을 좀 바꿔서 다시 계산해보라고 하였더니, 100세가 나왔다고 하며 기분 좋아 하신다.
평소 친하게 지내는 지인에게 나의 기대수명이 93세이고 잔여수명이 25세라고 말하였다. 관심있게 듣고 있던 지인의 눈빛이 살아나더니 그다음에 나온 말이 묘하다. 묘한 말 속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들어있음을 곧바로 알게 되었다.
“장수한다니 축하해요” “나는 그전에 먼저 떠날게요” “100세 시대에 너무 짧은 건 아닌가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기대수명이 길다는 것이 좋다는 말인지 싫다는 말인지 헷갈린다. 그것은 잔여수명이 25세라고하니 길지는 않으니 건강하게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말이었다.
나의 마음도 ‘사는 동안 건강하게’ ‘자녀들에게 짐 죄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이 분들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만약 부부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함께 떠날 수 없다면 남편이 먼저 떠나는 것이 좋다는 나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우리 부부는 평소 티격태격하며 다툴 때도 없진 않지만,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 많이 편이다. 하지만 아내에게 남편의 기대수명이 93세로 나왔다는 말은 그냥 하지 않았다.
아내가 내가 일찍 죽기를 바랄 리는 만무하다. 아내는 당신과 내가 수명이 같지 않다면 아내가 더 오래 사는 것이 좋다는 나의 생각을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날 밤 엎치락뒤치락하며 잠을 설치고 말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도 그 나이까지 산다는 게 기쁜 일만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오래 사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보람을 느끼며 즐겁게 사는 게 중요한 일이다.
기운이 없어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병상에 오래 있게 된다면 행복감이나 삶의 질은 딴 사람 이야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연히(재미로) 기대수명계산법을 두드렸다가 심각한 주제를 만난 것이다.
이날 이후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장수 만세’와 ‘건강 제일’ 중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히 ‘건강 제일’이다. 오래 사는 것보다는 건강하게 사는 게 나의 바람이다. 장수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건강하게 사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확실히 깨달은 것이다.
생각해보니 ‘9988(99세까지 88하게 살다)’이란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건강하게 살려면 제일 중요한 것은 열심히 운동을 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나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일 1시간내외 운동을 한다. 그리고 평소 심각하지 않고 즐겁고 살려고 노력한다.
아내는 내가 매일 운동하는 걸 존경스럽게 생각한다. 그리고 어린이 같기도 한 나의 천진난만한 웃음과 행동을 좋아한다. 은퇴한 후에도 나름 리듬있는 생활을 하니까 아내가 묻는다. ‘당신 정말 100세까지 살기로 작심한 모양이지?’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때까지는 너무 멀고 딱 93세까지만 건강하게 살았으면 좋겠네 ㅎㅎㅎ.” 이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
아내 그리고 지인들에게 말은 안했지만 이런저런 마음이 들긴 한다. 기대수명 계산식대로 내가 93세까지 산다곤 치더라도 사실은 벚꽃 구경 25번만 하면 끝이 아닌가. 물론 93세를 꽉 꽉 채워 사는 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반드시 부부가 함께 사는 동안 건강하고 즐겁게 행복하게, 스트레스 받지 말고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다.
가장 바람직한 일은 ‘건강 제일’을 지켜내며 장수하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나의 기대수명이 93세, 그러나 100세 시대를 못살게 된다니 살짝 아쉬움도 든다. 하지만 육체근력과 마음근력을 잘 유지하고 웰빙하는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면 ‘9988’을 넘어 100세까지 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자존감은 4~11세에 높아지기 시작해서 중년까지 완만하게 상승해 60세에 최고조에 이르고, 70세까지 이를 유지하다가 서서히 낮아진다>는 것이 스위스 베른대 연구진의 설명이다.
이 연구는 신체 자립도가 떨어지기 시작하는 시기는 75세부터다. 유럽과 일본은 이를 토대로 고령자 기준을 75세로 잡고 있다. 노화연구자들은 60~75세가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黃金期 Golden Age라고 한다.
100세를 살아본 철학자 김형석님도 자기 인생의 Golden Age는 <되볼아보니 60~75세였다>고 하였다. 나이가 들수록 세월이 빨라진다고들 한다. 이렇게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을 프랑스 철학자 폴 자네는 <시간 수축 효과>로 간단히 설명했다. 즉 1년의 시간을 10세는 생의 1/10로, 60세 어른은 1/60로 느끼기 때문에 나이들수록 시간이 빨리 흐른다고 자각한다.
사람이 한 살씩 나이를 먹듯이 나무는 나이테를 한 겹씩 늘린다. 오래 사는 나무는 환경에 순응하고 시련을 극복하면서 자란다. 나무가 세월의 흔적을 나이테에 남기듯, 사람은 살아온 흔적을 얼굴(주름살)에 드러낸다고 한다.
프랑스 철학자 J. J. 루소는 <청년기는 지혜를 연마하는 시기요, 노년기는 지혜를 실천하는 시기다>라고 하였다. 나이든다고 다 지혜로워 지는 것은 아닐 터. 내 삶이 연륜과 삶의 지혜에서 나오는 부드럽고 온화하고 겸손하고 내면이 단단한, 지혜를 실천하며 건강장수하면 좋겠다.
오늘, 내 몸의 나이테에게 얼마나 잘 익어가고 있냐고 물어봐야하겠다. <저작권자 ⓒ 한국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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